주보성인 –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정하상(丁夏祥)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축일은 9월20일, 본관은 나주(羅州). 부 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했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경기도 양주군 마재부락)의 큰 댁으로 낙향했다. 20세때 단신 상경하여 여교우 조증이 집에 의지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돌아와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 신부와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에 있는 주교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의 힘을 모아 추진했다.
정하상은 북경의 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使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을 밀사로 북경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했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 교회로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한 세계적 경륜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 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 교황 청원문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인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보내졌고 그 곳 책임자인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전교 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여 마침내 1831년 9월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됨)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 정하상은 조선 교구 설정 이후 조선 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했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땅(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 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 바쳐 일했다. 셋째,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 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했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여 체포된 후 박해 당국자에게 제출된 상재상서(上宰相書)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천주교의 도리를 펴고 박해가 그쳐야 할 것을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 정하상은 ac생명의 극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했다.
그는 기해 박해 때인 1839년 9월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했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됐다. 성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성 정하상 성인의 약력 | |
1795년 | 경기도 양근 마재(현 경기도 양주군 와구면 능내리)에서 부친 정약종과 모친 류 세실리아의 둘째 아들로 출생 |
1814년경 |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을 찾아 수년간 교리와 한학을 수학 |
1816년 | 부경사대사신(赴京使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며 수자-사라이바가 주교에게 사목자 파견 청원 시작 |
1825년 | 조선에 신부를 파견하고 또 계속적으로 보내줄 것을 골자로한 대 교황 청원문 발송 |
1827년 | 교황청 포교성성이 정하상과 유진길의 청원문 접수 |
1831년 9월 9일 |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조선교구 설정 선포 파리 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 |
1834년말 |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 |
1835년 | 모방(Maubant)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 |
1836년 | 샤스땅(Chastan)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 |
1837년 |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 |
1837년 – 1839년 | 앵베르 주교로부터 방인(邦人) 사제를 위한 신학교육을 받음 |
1839년 6월 1일 | 노모 류 세실리아와 누이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 최초의 호교론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의 도리를 펴고 박해를 중지 하도록 주장 |
1839년 9월 22일 | 기해박해로 45세에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 |
1925년 7월 5일 | 한국 순교자 79인과 함께 복자로 시복(諡福) |
1981년 3월 31일 | 광주 신장본당 변기영 신부가 현 광주군 동부면 윗배알미리 검단산 북쪽 계곡에 있는 부친 정약종의 묘소 근처에서 정하상의묘소 발견 |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3위(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와 함께 시성(諡聖) |